후덥지근한 더위가 강해질 무렵,
나는 학교에서 진학 확정을 받고,
밀림과 어딘가로 외출하는 일이 많아졌다.
딱히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모처럼의 연애 수습 기간이니,
뭔가 특별한 도전을 해봐야 할지도 모르지만,
까놓고 말해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뭐든 상관없지 않아?]라는 밀림의 호의에 응석을 부리며
우리들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같이 놀거나 무언가를 배우거나 하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름의 더위가 강해지자,
무슨 일이 벌어질 거 같다는 기대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러던 때,
한 통의 문자가 또다시 나를 혼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올여름은 어때? 수험 준비?'
카리나로부터의 권유…. 아니, 권유가 아니었다.
작년에 카리나 일행과 함께 심연을 들여다본
내게 썩은 내가 배였나 보다…..
(부녀자 = BL을 좋아하는 여성들 = 부자가 썩었다는 의미.)
그 썩은 내를 목표로, 카리나 일행이 또다시
심연 속에서 내게 손을 뻗어 온 것이다.
즉, 동인지 즉매회 조수 역할의 권유였다.
나는 즉시 [수험은 어떻게 됐어?]라 물었다.
카리나와 작년에 주고받은 대화 이후 소식이 끊겼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대학에는 합격해,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분명 카리나가 선배, 내가 후배인데도, 이상한 인연 때문에
내가 카리나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 적도 있다.
카리나의 공부에 신경을 쓴 이유는 만에 하나 수험을 보게 될 경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지만.
어쨌든 카리나 일행의 동인지 제작이라.
나는 딱히 참가해도 상관없다는 느낌이었다.
그때 보낸 시간은 뭐랄까? 충실감? 만족감?
마치 늪에 서서히 잠기는 듯한 느낌이 있어서,
나도 그 후로 동인지 제작을 시도해 볼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겨울 즉매회 신청은 여름 즉매회 종료 직후쯤에
마감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다는 신청을 하지 못 했고,
형편상 겨울 즉매회 참여를 포기하게 된 것이다….
분명 그 여름의 충실감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기는 했다.
다만, 지금의 나는 여자 친구의 소유물.
동인지 작업은 여성 3명과 한 곳에서 지내며 진행된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게 뭔 개소리야라고 지적받아도 이상할 게 없다.
막바지 작업이 너무 힘들었어서 카리나 일행과는 아무 일도 없었고,
올해도 분명 마찬가지겠지만, 그건 밀림에 대한 배신 행위로 보일지 모른다.
그런데 그때 천사가 강림했다.
늘 밀림과의 관계에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 느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라 고민했다.
하지만, 여기서 즉매회라는 이벤트가 발생했다─.
나는 밀림을 끌고 가려했다.
그 썩은 내가 나는 늪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끈쩍끈쩍한 충족감을 함께 맛보자 생각한 것이다.
'알겠어, 갈게.'
밀림은 별 말없이 간단히 승낙했다.
너무나도 가벼운 승낙이었기에, 맥이 좀 빠졌을 정도다─.
여자 셋과 함께 지내며 작업을 하기는 하지만,
목욕을 할 시간조차 없으며 방안은 지옥으로 변한다.
라는 식으로 설명을 했는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동안,
이건 거절당하겠다는 마음이 커져가던 내게 있어
밀림의 간단한 승낙은 정말로 의외였다.
혹시 이 세계에서는 지옥의 의미가 다르게 통하나 싶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의미는 같았던 것 같다.
그런데도 허락한 이유를 물으니,
[갈게]라는 답변을 제외하고는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뭐, 별 상관없나 싶어 나는 카리나에게 연락했고,
올해는 밀림도 함께 작업할 것이라 전했다.
'늪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카리나는 환영해 주었다.
이렇게 우리는 깊고 어두운 늪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작년을 웃도는 혼돈이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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