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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소설/백만 번 전생한 나는, 평화로운 세상이라도 방심하지 않는다 (중단))

50화 신의 현현

by Hellth 2022.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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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몇 달 주기로 기억상실에 걸리는 생물이다.

분명 지옥을 봤을 것이다. 다가오는 마감, 새하얀 원고.
[하루에 5일 치 분량을 매일같이 할 수만 있다면]
이라는 말도 안 되는 스케줄 탓에 수명을 단축시켜가며 작업을 해야 했다.

그 고통은 틀림없이 두 번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을 것이고,
제대로 계획만 세운다면 피하는 것이 가능한 고통이었다.

그런데도 카리나는 작년 일을 잊어버린 것 같다.

'아니, 잊지는 않았어. 오히려 잘 기억하고 있지.
작년에는 고생했지. 복사기로 인쇄하고 일일이 수작업으로
제본할 수밖에 없지 않냐는 상황까지 갔으니까….
하지만, 우리들은 기억하고 있어.
그런 상황이었는데도 어떻게든 해냈다는 걸.'

차라리 그냥 죽을까 싶었다.

핫! 이러면 안 돼…. 나는 평온한 마음을 소유한 17살.

백만 번의 전생 경험은 내게 감정과 언동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
물론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감정이 그대로 표출되는 일만큼은 없는 것이 바로 나다.

아무리─

"인쇄소에서 기다려줄 수 있는 기간이 닷새인데,
모든 페이지가 공백, 심지어 이번에는 풀컬러라.
그래, 한번 해보자, 20페이지."

이런 상황에 놓였다고 한들,
온화한 태도로 적절한 스케줄을 짜지 않으면 안 된다.

닷새만에 이 모든 작업을 끝내려면, 어떻게 계획을 짜야할까.

생각해라…. 어째서 내가 스케줄까지 관리해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보다, 어째서 애초부터 내게 스케줄 관리와 잡무를
맡길 준비가 되어 있던 것인지가 의문이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을 할 시간조차 아까운 상황이다.

우선 의미 없는 것부터 정리해가며 최대한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수면…. 수면일까…? 어때? 필요할까? 필요하지.
그럼 30분 정도면 충분할까? 다음은 식사….
뭐, 사람이라면  식사와 수면은 필수지만,
인간인 채로는 이번 스케줄을 맞출 수 없으니,
인간을 포기한다 치고….

계획이 완성되었다.

우리들은 백지를 채워나갔다.

[영감이 떠오르질 않아!]라는 말에 책장에서
우연히 눈에 띈 만화를 꺼내 들어 [이 전개를 써!]라고 되받아쳤고,
[갑자기 주인공 얼굴이 기억이 안 나!]라는 말에
[그럼 적당히 머리를 기르거나, 그림자로 가려!]라고 되받아쳤다.

에너지 드링크와 영양제를 섭취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문명인이 원시화되면 이런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명적인 원시인이 된 여자가 발하는 열량은 굉장했고,
에어컨이 돌아가는 방안에서도 산 채로 쪄지는 듯한 느낌을 맛보며
나는 내게 일임된 코스프레 의상을 열심히 완성시켜 나갔다.

밤샘과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는 작업에 대한 스트레스로
우리들은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고,
몇 번이나 서로 다투며 폭발하기 일수였다.

그럴 때마다 청량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밀림이었다.

밀림은 수인종. 짐승과도 같은 귀와 꼬리가 나 있다.
그리고 복슬복슬한 것에는 진정작용이 존재했다.

우리들은 흥분할 때마다 밀림의 복슬복슬한 털을 만졌다.
밀림에게는 가장 넓은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목욕과 식사도 자유롭게 해 주었으며 털 상태를 유지하게 했다.

나흘이 지났을 무렵, 방에는 밀림 님이라는

유일신을 믿는 신규 종교의 비밀기지로 변해있었고,
하루가 다르게 밀림 님에게 바쳐지는 에너지 드링크의 양은 늘어만 가며
하루에 고작 30분밖에 확보하지 못한 수면 시간 때문에
눈에 핏발을 세워가면서도 밀림 님 전용 제단을 만들기 했다.

점점 우리들은 인간의 언어를 잃고,
[밀림 님]이라는 언어로만 대화하게 되었다….
[밀림 님?], [밀림 님], [밀림… 밀림 님!?], [밀림 니이임~]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소통이 가능했는지 궁금하다.

우리들이 완전히 밀림 님 이외의 언어를 잊은 채,
고형물을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기고,
눈앞이 번쩍번쩍 거릴 무렵에서야 원고와 의상이 완성되었다.

기적에 가까운 작업 속도였다.

모든 것을 끝마친 우리는 밀림을 둘러싸고,
작업 종료를 보고하기 위한 예배를 드렸다.

둘러싸인 밀림은 무표정으로 엎드려 있었지만,
밀림의 엉덩이 쪽에 있던 나는 꼬리의 움직임으로
그녀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척 당황스러워하기도 하고, 약간 겁을 먹기도 했다.

이 끔찍한 작업을 돌이켜보며 카리나가 말했다.

'어떻게든… 하면 되는구나.'

그 해맑은 표정은 마치 신화에 나올법한 전쟁을
끝마친 영웅의 얼굴이었다.

우리는 사선을 넘어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스케줄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싸움은 피한다.]가 신조인 나조차,
짜릿한 성취감을 느꼈다. 눈물이 흘러 멈추지 않는다.
밝은 빛이 보인다. 밀림 님의 후광이….

이 감동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인생에는 반드시 여력이 필요하다고─.

나한테 스케줄 관리를 시킬 거면,
좀 더 빨리 부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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