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소설 79

49화 늪

후덥지근한 더위가 강해질 무렵, 나는 학교에서 진학 확정을 받고, 밀림과 어딘가로 외출하는 일이 많아졌다. 딱히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모처럼의 연애 수습 기간이니, 뭔가 특별한 도전을 해봐야 할지도 모르지만, 까놓고 말해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뭐든 상관없지 않아?]라는 밀림의 호의에 응석을 부리며 우리들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같이 놀거나 무언가를 배우거나 하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름의 더위가 강해지자, 무슨 일이 벌어질 거 같다는 기대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러던 때, 한 통의 문자가 또다시 나를 혼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올여름은 어때? 수험 준비?' 카리나로부터의 권유…. 아니, 권유가 아니었다. 작년에 카리나 일행과 함께 심연을..

48화 비구름 사이로

늘 미적지근한 수영장에 몸을 담그고 있는 듯한 불쾌한 습도와 함께 높은 기온인 계절이 다가왔다. 이 시기에는 살아있는 것 자체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세상에는 그런 사고방식도 있는 모양인데, 나는 이 사고방식에 대체로 찬성하고 있다. 빨리 죽는 것보다 좋은 일은 없으며, 나의 [생존]의 목표는 곧 [무한 전생이라는 괴로움의 윤회를 끊어내는 것] 즉, 죽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3학년 교실은 입시에 대한 긴장감과 눅눅한 습도, 뜨거운 기온에 의한 스트레스가 맞물려 불쾌한 공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나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기에, 소란 피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분명 짜증이 날 것 같은 놈과는 되도록이면 엮이지 않도록 움직이고 있지만, 30명 ..

47화 수습기간의 중요성

'렉스는 어떡할래?' 역질문. 내 인생은 언제나 역전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물론 [지옥에서 천국으로]가 아닌, [천국에서 지옥]으로 향하는 역전 현상이다. 물론, 행복과 불행을 항상 저울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불행해도, 나는 행복한 경우가 있고, (라고 할까 대부분이 그렇다.) 반대로 내가 죽고 싶어질 정도로 불행하다 인식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보면 행복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과 불행의 전환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인가? 그 계기는 언제나 [결단]에 의해 생겨난다. 결단이란, 곧 [어떤 선택지를 버리고, 다른 선택지를 취한다]라는 것인데, 나는 여태껏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간에 나는 쉴라 선생님의 조언을 듣고, 밀림..

46화 복병

훌륭한 조언자가 있는 삶은 행복하다. 나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 그것은 [조사 부족], [지식 부족], [상상력 부족]뿐만이 아니라, 내가 나이기에─. 즉, 내가 남자이기에, 고3이기에, 혹은 그 부모님의 아들이기에, 안나나, 밀림과 아는 사이기에 모르는 것들이 존재한다. 반대로 여성이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고2가 아니어야 알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부모님이 달랐더라면 안나와 밀림과의 접점이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백만 번이나 전생시킨 전지 무능한 존재가 아니고서야,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지 무능한 그 녀석조차, 전지전능한 자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기에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조언자가..

45화 똥의 길

나는 아기의 똥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똥은 더럽다. 그것은 생리적으로는 물론, 세균학적으로도 그렇다. 배설물이자, 몸이 [필요 없다]라고 판단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물에 따라서는 자신의 똥을 먹고, 영양을 보충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지만, [인간인데, 자기 똥을 먹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솔직히 구역질이 나고, 접근 자체를 꺼릴 것이다. 똥은 더럽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아기의 똥은 어떤가? 똥은 보기만 해도 불쾌해진다. 남의 똥은 더더욱 그렇다. 공중화장실, 내리지 않은 변기…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쾌한 경험들. 손잡이를 눌러 물이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내 마음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허무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기저귀를 갈고 있는 내게 그런 불쾌감은 들..

44화 새로운 생명

붉은빛을 띤 이파리가 어제 내린 비로 인해, 땅에 달라붙어 있다.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파릇파릇한 녹색 잎들은 지고, 주위에는 낙엽들이 깔려있었다. 특히 고등 학과 교사로 향하는 비탈길은 이맘때쯤이면 가로수에서 많은 잎이 떨어져, 청소를 하는 사람들과 학생들이 인사를 나누는 광경은 이 계절의 구경거리가 되어있었다. 너무나도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우리는 다시 한 걸음 진급에 다가간다. 문화제, 학생회 선거도 별 탈 없이 끝마치고, (또 학생 회장이 되었다) 올해의 행사들도 대부분을 끝마쳤을 무렵, 드디어 학년 내에 만연한 연애 열병도 시들시들해져 가는 기미가 보이는 데다, 날씨도 선선해져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과하게 [공부하고 있는 어필]을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고, 수업 중간중간 잡담..

43화 생명과 존엄

생존이 최우선이고, 그 이외의 것은 전부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느낄 수 있을만한 것들과 접하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 이번에는 특히 카리나와 그녀의 동료들로부터 '왜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하는 거야?' 라는 말을 들었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죽지 않기 위한 활동]의 일환이다. 피로를 축적하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는다. 무리하지 않는다. [생존]을 얕보지 않기에, 철저하게 전략을 세운 노력이 내 계획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는 어떻게든 마감 시간을 제때 맞추어, 인쇄를 무사히 끝마치고 여름 축제로 떠났다. 인쇄한 책들은 인쇄 회사 측에서 회장으로 직접 보내준다고 한다. 작년에는 근처의 복사기로 복사한 뒤, 수작업으로 제작한 다음 손수 운반했다는 것..

42화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

오랜만에 만난 카리나는 역시 안대도, 붕대도 착용하지 않은 상태로 대신해서 안경을 쓰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부터 도전할 건─ 전쟁이나 다름없어.' 축제 때 가게를 내자는 말을 들은 나는 매대를 여는 것과 같은 상상을 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고, 또 어떻게 보면 정답이었다. 우리들이 다루는 것은 솜사탕도 아니고, 불을 사용한 음식도 아닌, [책]이었다. 동인지 판매회─. 그런 이벤트가 큰 것만 따져도 해마다 2회씩 행해지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아마추어가 쓴 만화나 소실 및 굿즈 또한 판매된다고 한다. 카리나는 고등 학과에 입학한 뒤로 해마다 참가하고 있으며, 올해가 세 번째 참가라고 한다. 지금은 단골손님도 생겼다고 한다. 확실히 그녀가 그린 만화는 그림체도 좋고, 만화를 잘 읽지 않는 나 또한 이해하기..

41화 여름 축제의 권유

푸르른 하늘이 원망스럽다. 묘하게 어수선한 공기가 교실에 흐르는 가운데, 그런대로 빠른 속도로 봄이 지나가고, 기어코 교사까지의 언덕길을 오르기만 해도 땀방울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무더운 계절이 왔다. 들떠있는 분위기는 여름의 열기 탓에 교실 안, 아니, 2학년이 생활하는 2층 그 자체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긴장감이 돌고 있다. 모든 것은 [연애] 때문이다. 연애라는 이름의 열병은 여름의 열기에 달아올라, 점점 더 심각한 질병으로 변화하고 있다. 나는 연애에 흥미가 없다─. 흥미가 없지만, 어딜 보나 이 열병에 걸린 녀석들만 보이는 상황이기에 연애에 흥미가 없다는 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나는 솔직히 굉장히 분노하고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본 적 있겠지. 관심..

40화 사랑과 사회

'렉스, 너는 진짜 바보구나.' 바보란 무엇일까? 나는 역시 [바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에 성적을 고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학교 성적은 솔직히 말해, 동기부여의 문제니까. 내 성적은 학년 1위지만 내 지능이 남들과 비교했을 때,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번에야말로 천수를 누리겠다]라는 열의를 가지고, [천수를 누리기 위해선 공부한다 (=이 세계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바라는 길)] 를 노리는 편이 좋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는 점과 [쉴라에게 절대 지지 않겠다]는 대항심을 키우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나는 [바보]라는 말은 단순히 지능의 높낮음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래서 학년 1위인 내가 바보 취급을 받아도 이상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