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으로 사람의 가치를 매길 수 있는가?
나는 [매길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게 성적이란,
이 세계의 시스템 밖에 서있는 지배자인 척하고 있는
어른들이 앞으로 진출할 자들을 속아내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수함은 성적과는 바른 곳에 있다.
나는 성적표의 평가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내가 바보라고 생각하는 자는 열정이 없는 자이거나,
성급한 자, 혹은 타인을 깎아내려하는 자들이다.
카리나는 그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적]과 계속 싸워온 전사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했다….
카리나는 바보다.
'렉스, 너를 신용하기에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 줘.'
이때, 나는 중등 학과 2학년, 카리나는 3학년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는 연령이 올라갈 때마다,
보다 고도의 교육을 받는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
2학년은 1학년 때 배운 것을 전제로 한 교육과정을 받게 되며,
3학년 역시 마찬가지로 2학년 때 배운 것을 바탕으로 한 교육과정을 받는다.
즉, 2학년인 나에게 공부를 배우는 의미 같은 건, 없을 텐데….
하고 생각하던 때.
카리나가 웃으며 말했다.
'렉스, 너는 시험을 치를 때마다,
매번 전교권에서 놀기에 모를 수도 있어.
하지만 세상에는 네 상상을 초월하는 자들이 있지.
예를 들자면 눈앞에 있는 나랄까.'
카리나의 성적표는 5단계의 평가 기준 중,
1이 무더기로 적혀 있었다.
(1이 최하다.)
재봉은 특기라며,
카리나는 가정 과목의 [4]를 강하게 어필했는데.
뭐야, 너. 마법 과목도 1이잖아!
같이 신을 소환하는 술식 같은 것도 했으면서!
고문서들을 보며, 고어나 술식을 해석하고(고대어, 사회),
술식을 짜내고, 그려내며(마법, 미술),
소환 문구를 현대어로 재구축하거나(국어),
필요한 도구들을 제작했잖아(마도 기계).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고문서를 해석하고,
소환식을 구축할 때, 대부분은 내가 했고,
카리나는 수수께끼의 장식 두세 개를 추가했던 것 같다….
소환진을 그린 것도 나였고, 도구 제작 또한 마찬가지.
카리나는 오로지 잡담과 커피 준비 요원에 불과했다….
결론, 카리나는 공부를 못 한다.
나는 망설였다….
2학년인 내가 외부 입시를 준비하는 3학년에게 공부를 가르친다니,
책임이 너무 크다.
카리나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런 책임은 질 수가 없다.
나는 책임을 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책임이란, [빚]과 마찬가지다.
인생이라는 고된 길을 걷는 나의 두 어깨 위에 얹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이다.
[천수를 누린다]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내게 있어,
짐은 가벼울수록 좋은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카리나를 포기할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올해 그녀와 보낸 추억이 되살아난다.
중등 학과로 진학하면서 지루한 흑백 인생을
뒤바꿔준 사람이 카리나였다. 동지와 만났다.
함께 노력하고, 서로를 이해해줄 수 있는 동지….
그것만으로도 나의 마음은 상당히 구원받았다.
또한 카리나는 신체 접촉에 그다지 신경 쓰는 편이 아니라,
고문서를 함께 바라볼 때면 어깨끼리 맞닿아 두근거렸고,
여름에는 블라우스 속 속옷이 비치거나 해서,
정말 눈을 둘 곳을 몰라하며 힐끗힐끗 쳐다보곤 했다.
동지를 상대로 이런 일에 일일이 의식하는 것은 어떨까 싶지만,
나는 13살….
정신은 육체에 영향을 받기에, 사춘기라 어쩔 수가 없었다.
한 번의 대화로 호감도가 10 정도 알라간다면,
한 번의 접촉으로는 호감도가 100 정도 올라간다 생각했기에,
이미 [카리나가 날 좋아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참이다.
수험까지 앞으로 약 10개월….
우리들의 공부는 이제 막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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