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소설/백만 번 전생한 나는, 평화로운 세상이라도 방심하지 않는다.

71화 현실 처리 능력

Hellth 2023. 1. 20. 21:00

'혹시 렉스는 동인지 제작에서 손을 씻고 싶은 걸까….'

내가 [취직 어때?]라고 묻자, 카리나는 그렇게 답했다.

유난히 춥고, 건조한 날이었다.
내쉬는 숨은 당연하다는 듯이 하얬고,
손등과 입술이 거칠거칠했다.

우리는 내가 끓인 따뜻한 차를 마시며 지내고 있다.
겨울 코미케가 가깝지만, 우리에겐 조급함이 없었다.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그런 안정감 속에서 약간의 외로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내 나름대로 생각해 봤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렉스는 그때도 BL 동인지 제작 지휘를
그만두겠다고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분이 든다니…. 나는 확실히 말했다고.
일부러 들으라고 조용한 타이밍에 말했다.

'어!? 왜!? 그만둔다고!?'

라는 반응 또한 나왔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고 생각하는데,
어째서인지 카리나는 이제야 눈치챘다는 듯이 말했다.

'렉스, 우리는 말이야. 얘기는 들었지만, 얘기를 듣지 못했어.'

또 시작이다.
카리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자주 내뱉는다.

카리나 나름대로의 이론이라 해야 할까, 생태라고 해야 할까….
나는 이해하기 힘든 자신 나름의 법칙 속에서 카리나는 살고 있었고,
카리나 주변에 모인 이들도 그녀와 같은 모습이었다.

'아마, 우리는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것 같아.
머릿속에서 뭔가를 떠올리면 그거에 정신이 팔려버려.
누가 뭐라 하든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아….
그런 일이 자주 있었지.'

"그거야 뭐,
크던 작던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라 생각하는데…."

'그런 얘기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그래, 이야기!
우리들은 현실을 자신이 그리고 있는 이야기라 생각하는 경우가
대다수라, [이 장면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라고 무의식적으로
정해버리면 그 장면은 그 이외의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돼….'

────?

'렉스가 BL 동인지 제작 지휘를 그만두겠다고 한 것 맞을 거야.
내가 분명 어떤 반응을 보였겠지….
하지만, 내 기억상 그때 렉스가 스케줄 매니저로
승급한 일로밖에 기억에 남아있지 않아.'

맙소사,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카리나 양? 면접 같은 건… 잘 준비했나요?"

'그래, 그거 말이야. 면접…. 게다가 취직까지….
나는 하지 않아. 만화가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어.'

"그렇구나."

그 길은 불확실한 길이고, 나로서는 권장할 수 없는 길이지만,
카리나의 길이니 카리나가 좋다는데 남인 내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렉스, 지금 몇 월이지?'

"12월이네."

'그렇구나, 12월이네. 그럼 두 달 뒤면… 시작하는 거야.'

"뭐가?"

'소득 신고.'

…………….

그것은 일정 이상의 수입을 가진 자들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국민의 의무 중 하나.

당연히 알고 있다─.
국가라는 이름 하에 보호받으며 살고 있으니,
세금을 거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의료, 생활, 기타 등등의 서비스는 국가가 존재해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묘한 것은 학교에서
소득 신고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독학으로 배울 수밖에 없었다─.
뭐, 나는 아직 소득 신고를 할 입장도 아니기에,
그저 대비하고 있을 뿐이지만.

또한 내가 실제로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세무관계를 전문으로 삼는 직업이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정량의 금전을 지불하고 의뢰하면
상당히 안전하고 확실하게 소득 신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렉스, 있잖아. 우리 일은 수입이 일정치 않아서
세무사에게 부탁할 정도는 아니지만,
가급적이면 최대한 공제를 많이 받고 싶은 상황이야.
그 경우… 스스로 소득 신고를 하는 수밖에 없어….'

이해가 가질 않지만,
나는 만화와 관련해선 문외한이다.

그 길로 나아가려는 카리나가 그렇다니, 그런 것이겠지.

'하지만 렉스…, 나는 밀려오는 현실에 대처할 수 없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세상에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적인 작업이 존재하지?
예를 들면… 취업 면접 준비나, 시험공부, 방 청소 같은 거….
나는 그런 걸 할 수 없어…. [해야 한다]라는 건 알지만,
할 수가 없다고 해야 할까. 몸이 움직이질 않아.'

"아니…, 의욕을 내라고…."

'렉스, 내가 사는 세상은 현실이 아니야.
꿈속 세계에 살고 있는 거라고.'

"숨 쉬는 걸 멈추면 곧바로
지금 있는 곳이 현실이라는 걸 깨닫게 될걸?"

'그런 얘기가 아니야. 너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세상에는 현실적인 작업을 할 수 없는 사람 또한 존재하는 법이라고.'

"뭐, 으음─. 그렇네.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지."

단정과 믿음은 세상과 시야를 좁힌다.
그렇기에 어떤 일이든 함부로 단정 지어선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렉스, 내 소득 신고 좀 대신해주지 않을래?'

"응, 싫어."

'돈은 낼게! 그, 그래! 고기는 어때!? 불고기!
여, 영화비도 내가 낼게!'

카리나가 유난히 필사적이다.

나한테 줄 돈이 있으면 세무사한테 내라고 했더니,
우물쭈물거릴 뿐.
아무래도 어떤 사정으로 인해 그것은 싫은 모양이다.

아마 초면인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 싫다거나,
아니면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나는 망설였다.
우선은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지?]라는 솔직한 의문이 떠올랐다.

소득 신고는 수입도 지출도 세세하게 봐야만 하기에,
당연히 카리나의 돈의 흐름이 내게 노출되게 된다.

"나는 남이라고. 나보다 우선 가족한테 부탁해…."

'가족한테는 그냥 평범하게 취작 한다 얘기했어.'

그건 좀 곤란하네….

모르겠다. 어째서 나는 카리나와 엮이면 이렇게 되는 것일까….
나는 카리나의 뭐지? 엄마? 엄마인가?

스트레스 없는 인생을 바랐을 터인데,
카리나와 엮이면 묘하게 스트레스를 받아버린다….
이것이 영웅에게 휘말린 일반인의 말로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의 광명이 내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즉, 변칙적인 기둥서방으로 불리는 위치에
내가 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카리나의 스케줄 관리니, 재정 관리니 하는 입장은
쉽게 말해서 비서였다.
그리고 비서란, 기둥서방을 멋있게 표현한 직업이다.
(혼날까 봐, 대놓고 말하지는 못 한다.)

인생의 선택지는 많은 편이 좋고,
지금의 내게는 [평범하게 취직], [부모가 경영하는 학원에 취직],
[밀림의 기둥서방]이라는 세 선택지가 놓여있다.

여기서 카리나의 비서를 추가하는 것은 꽤 나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상업지 만화가로서 카리나가 성공할 경우,
그 리턴 또한 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런 선택지를 없애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이라 생각한 나는
그녀의 제안을 승낙해버리고 말았다.

'아싸! 그럼 나중에 영수증 모아놓은 거 가져다줄게!'

스물한 살을 맞이한 겨울. 나는 소득 신고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