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빛을 띤 이파리가 어제 내린 비로 인해,
땅에 달라붙어 있다.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파릇파릇한 녹색 잎들은 지고,
주위에는 낙엽들이 깔려있었다.
특히 고등 학과 교사로 향하는 비탈길은
이맘때쯤이면 가로수에서 많은 잎이 떨어져,
청소를 하는 사람들과 학생들이 인사를 나누는
광경은 이 계절의 구경거리가 되어있었다.
너무나도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우리는 다시 한 걸음 진급에 다가간다.
문화제, 학생회 선거도 별 탈 없이 끝마치고,
(또 학생 회장이 되었다)
올해의 행사들도 대부분을 끝마쳤을 무렵,
드디어 학년 내에 만연한 연애 열병도
시들시들해져 가는 기미가 보이는 데다,
날씨도 선선해져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과하게 [공부하고 있는 어필]을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고, 수업 중간중간 잡담을 하며,
카리나에게서 온 [겨울은 어떡할래?]라는 카톡에
[그쪽이야말로 수험은?]이라고 답변하자,
읽씹을 당하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들도 내년에는 수험이다.
(※수험 = 수능)
아직 1년이나 남았다고 할 수도 있고,
1년밖에 남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주위에는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이 3분의 1 정도,
근거도 없이 [아직은 괜찮아]라며 느긋한 사람이 3분의 1 정도,
남은 3분의 1이 내년의 수험에 진지하게 대비하고 있는 사람으로,
이외에도 소수이지만, 취직을 목표로 하는 사람 또한 있었다.
취직.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번다는 그 길을 고려해본 적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 될 것이다.
현재처럼 생활의 대부분을 부모가 뒷바라지해주는 상황을
[안정적인 생활]이라 할 수 있을까?
안정. 그것은 내가 바라고 바라는 것.
장수하기 위해선 안정이 중요하고,
스트레스가 적어야 하며,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고,
그럼에도 혼자서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하는 것이
내가 목표로 삼고 있는 미래다.
심사숙고한 결과,
나는 학생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취직이란, [구용주의 변경]이나 다름없었다.
학생 신분인데 고용주가 어디 있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허나, 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에게 고용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의문을 품었던
[어른은 왜 아기를 VIP 취급해주는 걸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이 이것으로 부모는 아기가 곧 성장하고,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실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아기를 돌보고, 아이가 무사히 성장해,
이익을 분배받을 수 있도록 제 몫을 다할 때까지 키우는 것이다.
즉, 나는 의식주를 보장받고, 어느 정도의 자유와 돈을 받는 대신
[장래]라는 것은 부모에게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오랜 의문이 해소된 끝에 나는 가슴 한편이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17년 전, 나는 이 세계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인생을 시작했다.
울고, 먹고, 흘릴 수밖에 없는 스스로 설 수조차 없는 나약한 생명으로.
이런 생물을 돌봐, 무슨 득이 있다는 걸까?
너무나 극진하게 나를 대하는 엄마와 아빠의 의도를 헤아릴 수가 없어,
[아기야말로 최강]이라는 가설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아기는 약했다.
백만 번의 전생 경험으로 말하자면 이런 생물을 돌볼 가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신세를 졌다.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는 나라는 아기는 이렇게 17세가 되는 해까지 무사히 살아남았다.
[장래]를 대가로 삼아서!
확실히 아기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머지않아 부모가 늙었을 때 아기였던 생명은
가장 절정의 시기에 이른다.
이는 자신보다 젊은 자의 반란을 방지하며
늙고 약해진 본인들을 보살피라는 원대한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걸 깨달은 나는 어린아이들에게 은혜를 파는 활동을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학생회 활동으로 유치원, 초등 학과, 중등 학과에
가야만 일들이 꽤 있었기에 그럴 때마다 아이들을 돌보고, 그들을 귀여워해 준 것이다.
아무런 의문 없이 무럭무럭 자라겠지만, 장차 깨닫게 될 것이다.
애정이라는 이름의 족쇄가 이미 자신에게 차여져 있음을.
후후훗, 성장해라. 얼른 성장하는 거야….
그러던 와중, 어느 날 밀림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아기, 태어났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나는 많이 혼란스러웠다.
[눈에 띄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는다.]
세 번을 되뇌고, 심호흡을 했다.
나는 [눈에 띄지 않는다]를 외침으로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버릇이 있다.
인생에서 몇 번이나 이 말을 외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이제는 사실상 주문처럼 되뇌고 있는 수준이었다.
나는 내 머리가 여러 상상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밀림에게 아기가 태어났다라.
일단 밀림이 누구지?
그래! 내 귀여운 동생이야.
머나먼 동쪽 섬나라에 많이 살고 있다는 수인 종의 소녀로,
지금은 고등 학과 1학년이자, 얼마 전에 학생회에 들어왔다.
격주로 내 방에 초대해, 스터디 모임 같은
단순한 잡담회를 열고 있기도 하다.
고등학생이 된 여자의 시간을 격주로 한 번씩 빼앗는 것에
약간의 죄책감도 느끼고 있었기에,
아무리 어린 시절부터 습관처럼 해왔더라도,
일부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전한 적이 있었지만,
밀림은 완강했고, 우리의 교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밀림의 고등 학과 생활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많다.
학년이라는 이름의 벽이다.
학년이 다르면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다.
물론 학생회 활동으로 학교에서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지만, 내가 모르는 밀림의 생활 또한
분명히 존재했고, 그런 생활까지는 내가 파악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축하해줘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밀림도 이제 16살.
육체적으로도 아기가 생긴 들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만,
학생인데 아이가 있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은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차가운 풍파를 맞고 있을 밀림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축복일 것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밀림의 상대를 이 세계로
전생시켜 줘야만 할지도 모른다…….
'렉스, 있잖아, 들어줘.'
"네."
'친척 아기. 내 아기 아니야.'
"네."
……그렇겠죠─!
그럴 거라 생각했어!
그럴 수밖에 없지. 어째서 밀림의 아기라 생각한 거야?
의미를 모르겠네. 밀림이 그럴 리가 없잖아.
'렉스, 짐작 가는 거 없어?'
"집히는 게 없는데."
뭐랄까 이틀 전에 집에서 만났을 때는
아기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농담이야]라고 밀림에게 말한 뒤,
아기에 대한 감상을 나누기로 했다.
아무래도 밀림의 친가 쪽 친척 중에 아기가 태어난 것 같다.
그리고 밀림네 집에 오기로 했기에,
어째서인지 밀림이 나를 불렀다는 것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어째서 밀림의 친척의 아기를 내가
봐야만 하는지, 의문점이 많지만, 그 아기에게 은혜를
입힐 수 있다면야 딱히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아이의 장래를 사는 것이다.
그렇게 밀림네 집에서 본 아기는 작고 귀여웠다.
나는 지금까지 내 안에서 쌓아온
[부모님은 장래를 대가로 아기를 돌보는 설]이 논파당했다.
그치만, 이렇게 귀여운 생물을 돌보지 않을 수는 없잖아!
그래, 부모님을 비롯해 나를 돌봐준 사람들은
나의 장래가 목표였던 것이 아니다.
귀여움과 동시에 힐링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의
아기의 기저귀를 갈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기저귀는 날마다 진화하고 있다는 것도….
(※참고로 밀림은 외가 쪽이 수인입니다.)
'웹 소설 > 백만 번 전생한 나는, 평화로운 세상이라도 방심하지 않는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46화 복병 (1) | 2022.09.16 |
---|---|
45화 똥의 길 (0) | 2022.09.16 |
43화 생명과 존엄 (0) | 2022.09.02 |
42화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 (0) | 2022.08.26 |
41화 여름 축제의 권유 (0) | 2022.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