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소설/백만 번 전생한 나는, 평화로운 세상이라도 방심하지 않는다. 79

79화 새로운 우리 집

20년 정도 전이라면 일을 해서 집을 사는 것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우리 부모님은 부모님의 부모님. 즉, 내 조부모님이 계약금을 내주셔서 집을 샀다고 한다. 나도 집을 사고 싶다면 계약금 정도는 내주겠다는 말을 들었지만, 상대가 가족이 됐든 누가 됐든 금전적인 빚을 지고 싶지 않아, 그 제안에 정중히 거절한 뒤 전세로 집을 구했다. 다행히 후견인이던 부모님의 신원이 확실했기에, 계약은 순조로히 진행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어느 저층 아파트의 위층에서 함께 동거를 시작했다. 침대, 냉장고, 보일러, 세탁기, TV, 탁자, 의자, 조리 기구 등등…. 챙길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도시가스 계약, 이삿짐센터, 주소 변경, 주소 변경에 의한 면허증 갱신 (내가 아니라 밀림이다.) 등….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

78화 도망칠 수 없다.

'상상해 봐, 선생님이라는 단어 왠지 좀 야하지 않아?' '너희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우리 주변에는 커플들이 넘쳐나지. 창밖을 봐, 작은 새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지? 그 시점에서 벌써 나뭇가지가 작은 새에게 깔려 있고 그걸 보고도 아무런 손을 쓸 수 없는 나뭇잎이라는 느낌이잖아.' '나는 디지털파지만 가끔 아날로그도 좋다고 생각해. 아날로그로 좋은 그림을 그리면… 질투하게 되잖아. 디지털 자식들.' 카리나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고마운 조언들을 해주고 떠나갔다. 심지어 내 취미가 BL 동인지 제작 지휘라는 것까지 떠벌리고 말이다. 잠깐, 취미가 아니라고! 아마 이 세상에서, '선생님! 저희들의 BL 동인지 제작을 지휘해 주세요!' 라는 말을 여중생에게 들은 교사는 나밖에 없지 않을까. "..

77화 썩은내가 따라다니는 인생

인생 최대의 스트레스가 닥쳐오고 있다. 이건 분명 내 고집이 원인인 스트레스일 것이다. 무의식 하에 깨워버린… 본래라면 깨지 않았을 스트레스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것을 제거하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좀… 하는 마음 또한 든다. 그러다 내가 취한 행동은 스스로도 놀랐지만─. 카리나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무척이나 싫지만…! 이건 스스로도 추악한 마음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나는 무의식 하에 카리나를 얕잡아 봤던 것 같다. 상대는 나보다 연상이고 만화가이다. 3대 장래희망에 속하는 꿈을 이뤄낸 위대한 루키 만화가이다. 하지만, 뭐랄까… 나보단 아래라고…! 애초에 타인과 나 사이에서 상하관계를 나누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다. 시시한 상하관계에 매달리다 목숨을 잃은..

76화 면종복배

※겉으로만 따르는 척하는 것을 의미하는 사자성어. 담당 고문을 맡아보겠냐는 갑작스러운 제의에 나는 너무 놀라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왜냐하면 내가 담당 고문을 맡을만한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담당 고문은 담임 선생님이 아니라, 동아리 활동 담당 선생님 같은 것을 의미한다. 다만 나는 동아리 활동을 해본 적이 없다. 즉, 취미가 없던 것이다. 또한 내신 점수를 버는데 열중했기에 동아리에서 좋은 성적을 남기는 것보다 학생회에 소속되는 쪽이 훨씬 더 난이도가 낮았기에 동아리에 열중할 생각조차 없었다. 뭐, 막상 들어보니 지도는 코치가 할 것이고 학교 측 관리자로서 이름만 빌려달라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렇다면야 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나는 책임자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생판 남인 아이..

75화 해자

※성의 외벽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라는 말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었다. 아니, 그런 것을 하지 않아도 되니 지금 고민하고 있는 거겠지. 이것 때문에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상대방이 밀림의 부모님이라 할지라도 아니, 그렇기에 오히려 뭐라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와 밀림이 결혼한다는 얘기는 솔직히 말해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그보다 밀림이 마음대로 진행하고 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확정된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나는 순순히 훌륭한 아내구나 라고 감탄했다. 아니, 아직 아내는 아니지만, 결혼이라는 인생에서 가장 귀찮은 일을 멋대로 진행시켜준 것에 감사한 마음밖에 없다. '…뭐, 밀림 쨩은 그런 면이 있지.' 안나 씨에게 2년 뒤에 결혼한다는 문자를..

74화 전략적 승리

'야, 렉스. 사람들은 왜 일을 해야만 하는 걸까?' 우리에게는 안식일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주에 한 번씩 돌아오는 날로 그날마다 마틴과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습관이 돼버렸다. 이제 우리도 어엿한 사회인이라는 소리겠지.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 2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현재 5월 중반. 이제 겨우 막 업무에 익숙해지기 시작해, 일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낄 무렵이랄까. 그런 시기인데 마틴이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어, 대체 어떤 비정한 운명이 그를 덮친 것인지 궁금해졌다. '날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잔업에…. 상사님께서 친절히 알려준 영업의 요령은 범죄라 볼 수 있을 정도로 아슬아슬…. 그야 예전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져서 무리라고! 게다가 호황기였던 시절을 기준..

73화 회상 ~함정~

그건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교생 실습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내가 간 곳은 내가 졸업한 학원의 중등 학과였다. 이대로 순조롭게 교사가 된다면 여기서 교편을 잡게 될 것이다. 즉, 지금 실습으로 폐를 끼치고 있는 학생들이 3학년이 될 무렵, 나는 신입 교사로 부임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득실을 따져본 결과, 이 반 학생들에게 아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취업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환경에는 [거기서 지내는 사람들]을 빼먹을 수 없다. 환경이란,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장 수가 많은 존재]와 [직속 상사]가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수가 많은 존재인 학생들을 경시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중등 학과에까지 내 이름이 나름대로 알려져 있는 것 ..

72화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했더라도, 역시 망설임은 사라지지 않았다. 매일같이 고민하고 있다. 나의 경험 탓인지, 직감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선택은 앞으로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것이다]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혹은 지금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막상 직면했을 때는 중대해 보였던 선택들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의외로 별 거 아니었다]라는 경우도 잦았다. 문제는 지금 이 선택이 중대한 것인지, 아닌지는 역시 시간이 흘러봐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예상은 할 수 있더라도 확답은 내릴 수 없다─. 인생은 살 때마다 새롭고, 어려웠다. 어쨌든 21년이라는, 지금까지 좀처럼 경험해보지 못한 시간을 살아왔다. 지금까지의 선택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너무나도 추웠던 겨울이 끝나자,..

71화 현실 처리 능력

'혹시 렉스는 동인지 제작에서 손을 씻고 싶은 걸까….' 내가 [취직 어때?]라고 묻자, 카리나는 그렇게 답했다. 유난히 춥고, 건조한 날이었다. 내쉬는 숨은 당연하다는 듯이 하얬고, 손등과 입술이 거칠거칠했다. 우리는 내가 끓인 따뜻한 차를 마시며 지내고 있다. 겨울 코미케가 가깝지만, 우리에겐 조급함이 없었다.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그런 안정감 속에서 약간의 외로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내 나름대로 생각해 봤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렉스는 그때도 BL 동인지 제작 지휘를 그만두겠다고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분이 든다니…. 나는 확실히 말했다고. 일부러 들으라고 조용한 타이밍에 말했다. '어!? 왜!? 그만둔다고!?' 라는 반응 또한 나왔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고 생각하는데, ..

70화 무더운 여름의 어느 날

물에 반사된 빛이 눈부시던 어느 날이었다. 하늘에는 세계 전역을 비추는 천체가 존재했다. 나날이 더워지는 계절, 한 번 해결된 나의 [장래에 대한 불안]을 뜨거운 열기로 지글지글 달구며 다시금 걱정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이 불안과 초조함에 대해,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나는 이미 충실하게 학업을 끝마쳤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알바로 번 돈은 대부분 저축을 해, 설령 바로 취업을 하지 못 하더라도 잠시 동안 연명할 수단도 있었고, 애초에 아버지가 운영하는 학원에 취직한다는 최후의 수단 또한 준비되어 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끝마쳤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이 취약한 인류의 육체에 깃든 내 미숙한 정신은 불안과 초조로 혼란에 빠져있었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밀림이 드물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