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소설/백만 번 전생한 나는, 평화로운 세상이라도 방심하지 않는다.

75화 해자

Hellth 2023. 2. 10. 20:30

※성의 외벽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라는 말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었다.

아니, 그런 것을 하지 않아도 되니 지금 고민하고 있는 거겠지.
이것 때문에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상대방이 밀림의 부모님이라 할지라도 아니,
그렇기에 오히려 뭐라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와 밀림이 결혼한다는 얘기는 솔직히 말해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그보다 밀림이 마음대로 진행하고 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확정된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나는 순순히 훌륭한 아내구나 라고 감탄했다.

아니, 아직 아내는 아니지만,
결혼이라는 인생에서 가장 귀찮은 일을
멋대로 진행시켜준 것에 감사한 마음밖에 없다.

'…뭐, 밀림 쨩은 그런 면이 있지.'

안나 씨에게 2년 뒤에 결혼한다는 문자를 보내자,
곧바로 전화가 걸려와 우리는 오랜만에 대화를 나눴다.

고요한 밤이었다.

내가 자취하는 아파트는 좁고 벽이 얇아,
밤이 되면 새의 지저귐이나 벌레 소리가 잘 들린다.

5월도 중순이 넘어간 이날,
유난히 벌레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최근 계절이 뒤죽박죽이라, 봄이 유난히 춥거나,
여름이 유난히 더워 가을이 사라진 영향인지는 몰라도
생태계 역시 변화가 일어나는 듯했다.

그렇게 벽이 얇은 아파트다 보니,
나는 자연스래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밀림이 그런 면이 있다니 무슨 소린가요?"

'……으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라.

과연, 확실히 일반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것 같다.
비겁, 선악, 고집, 불필요한 노력의 가감 등…
다양한 이유로 수단을 한정적이게 만들어 비효율적으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점에서 밀림은 확실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나와 동일하게 비효율과 낭비를 싫어하는 성격이다.
물론 법과 윤리는 지키지만, 효율을 위해서라면
고집을 버릴 수 있는 타입이며 또한 주변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는 것 같다.

'뭐, 렉스 군이 좋다면야 상관 없지만….
아, 그게 아니라 우선은 축하해지. 미안해.'

"축하해 줘서 고마워요. 그보다 조금 미묘하네요….
저는 안나 씨를 동경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거든요."

'그렇네, 그러고 보니 결혼 약속도 했었지.'

안나 씨는 전화기 너머로도 상대방에 대한 호감을
잃어간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평소보다 가벼웠고,
결혼 상대가 정해진 나마저도 그녀의 소녀 같은
말투에 무심코 두근거려 버렸다.

'있었을까나, 우리들이 결혼하는 미래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성녀 성탄절에 잠시 생각해 봤지만,
분명 그런 운명은 없었을 것이다.

운명─.
나는 그 말을 혐오하지만 운명이란 단어에
내포된 의미는 많고, 그 편리성에 거역할 수는 없었다.

"저희가 맺어질 운명은 없었어요.
오랫동안 생각하고 결론 낸 거기도 하고요."

'렉스는 단호한 면이 있지.'

"……혹시 제가 지금 엄청난 기회를
스스로 걷어 차버린 건 아닌가요?"

'아니 아니, 기회라니. 그러면 안 되지.
……뭐어, 그래도 렉스 군이니.
렉스 군 다움 같은 게 있다고 해야 할까?'

"그게 뭔가요…."

'안정감이 있어. 성격에 말이야.
그러니까 전부 포기하고 돌아갔을 때 의지하고 싶은 느낌?'

안나 씨가 취했는지도 모르겠다.

뭐, 하지만 숨은 뜻을 왠지모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이른바 해자다. 수수하고 견실하며 무난한.

그렇기에 여러 사람들에게 있어,
귀찮은 상대라 여겨질 것 같다.

'수수하고 견실하며 무난?'

"어, 아닌가요?"

'아니, 너는 화려한 편이지….

딱히 견실하지도 않아…. 무난하지도 않고.'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나와
안나 씨가 생각하는 나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이렇게까지 수수하고 견실하게 살고 있는 생물은
집에서 기르는 슬라임을 제외하곤 없을 것이다.

'수수하게 살려고 하는 건 화려하기 때문이지.
건실하게 살려고 하는 건 그렇지 않기 때문이야.
스스로가 그렇지 않으니, 반대를 목표로 하는 거고.'

…확실히, 일리가 있다.

내가 수수하고 건실하며 무난했다면 사는데 그렇게
노력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분명 내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수수하고
견실하며 무난하게 사려는 노력을 한 것이다.

'아무튼 밀림 쨩과는 잘 어울린다 생각해.
너희들은 뭐랄까…, 거짓말쟁이들이니까.
…아, 이거 칭찬이다? 무척 잘 어울려.'

왠지 모르게 말투가 느릿느릿 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대화 중에 점점 더 느려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와 통화를 시작했을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
지금도 계속해서 마시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안나 씨, 과음은 좋지 않아요. 수명이 준다고요."

'나는 짧고 굵게 살고 싶은데.'

의외였다.

하지만 이내 의외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큰 송이 꽃을 피우고 순식간에 타버릴 것만 같은
삶을 바라지 않는 자가 견실한 길을 버리고,
굳이 모험을 떠날 리가 없으니까.

안나 씨는 지금 음악 관련 뉴스를 보다 보면 잠시 뒤에
그녀의 이름이 들릴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지만….

음악가란 불확실성을 감안하면 언제 타버릴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분명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노력은 누구나가 하고 있다.

재능 또한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가 되는 사람은 많든 적든 재능이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선
재능과 노력 그리고 운까지 필요하고 운이란

말 그대로 우연히 얻게 되는 것이다.
손에 쥘 확률을 높이더라도 그것을 손에 쥘 수 있을지는
그야말로 운에 달렸다.

'……렉스 군은 가끔 나보다 연상이지 않나 싶을 때가 있어.'

"뭐, 인생 백만 하고도 첫 번째 인생이니까요."

라고 농담하듯 얘끼했다.

안나 씨는 웃으며 그럼 늦었으니 이만.
청첩장은 보내줘라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잠시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

어째서일까.

안나 씨와의 관계는 지금과 변함없이 계속될 텐데….
뭔가 묘한 외로움이 느껴져 그날은 좀처럼 잠에 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