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소설/백만 번 전생한 나는, 평화로운 세상이라도 방심하지 않는다.

79화 새로운 우리 집

Hellth 2023. 2. 24. 21:00

20년 정도 전이라면 일을 해서 집을 사는 것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우리 부모님은 부모님의 부모님. 즉, 내 조부모님이
계약금을 내주셔서 집을 샀다고 한다.

나도 집을 사고 싶다면 계약금 정도는 내주겠다는 말을 들었지만,
상대가 가족이 됐든 누가 됐든 금전적인 빚을 지고 싶지 않아,
그 제안에 정중히 거절한 뒤 전세로 집을 구했다.

다행히 후견인이던 부모님의 신원이 확실했기에,
계약은 순조로히 진행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어느 저층 아파트의 위층에서
함께 동거를 시작했다.

침대, 냉장고, 보일러, 세탁기, TV, 탁자, 의자, 조리 기구 등등….

챙길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도시가스 계약, 이삿짐센터, 주소 변경,
주소 변경에 의한 면허증 갱신 (내가 아니라 밀림이다.) 등….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일본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도,
그 동네 경찰서를 방문해 면혀증을 갱신해야 합니다.

사회 시스템에서 역시 적의 의도가 엿보인다.

아마도 적은 빈둥거리며 이사를 가는 것이 아니꼬워
일부로 절차를 번거롭게 만든 것이 틀림없다.

투쟁심을 꺾는다는 방침에 비춰보면
적은 주소 고정과 신분의 고착화를 목표로 하고 있을 것이다.

주소라는 것은 수입에 따라 바뀌며 수입이라는 것은
신분에 따라 달라진다.

귀족제가 폐지된 지 오래지만 역시 아직까지
귀족제의 자취가 남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한 일반 사람들은
기회조차 생기는 일이 드물고 기회가 생기더라도
그것을 유지하려면 굉장한 수고를 들여야만 한다.

어디를 봐도 가만히 있어라라는 의도가 느껴지는 것은
이 세계에 역시 적이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적은 통솔적인 권력을 보유한 자들이란 소릴까?

이사를 통해 다시 한 발짝 적의 정체에 다가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혹시 정치의 중추─?
얼마 전에 아버지가 정치판에 발을 들여볼까라는 상담을 해왔을 때,
그만두라고 충고한 것은 틀린 선택이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바쁜 수속을 끝마치고 가구도 어느 정도 갖추었을 무렵.
꽤 많은 저금이 사라지고 말았다.

역시 적은 이사를 하지 않도록 이사에 드는 노력을
높게 설정한 것이라 다시 한번 확신했다.

"우리 학교도 방학이라 다행이야."

우리는 이사 때문에 녹초가 되었다.

커다란 침대에 누워 집 천장을 바라보았다.

신혼집은 아니지만 눈을 감고 누워 있으니,
낯선 새집 냄새가 났다.

내 오른손에 밀림의 왼손이 닿았고,
왠지 모르게 나는 그 손을 잡고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렇구나─, 우리 집에 여대생이 있어─.

한 살 차이지만, 밀림은 아직 대학을 다니고 있다.

한 살 차이야 큰 의미가 없겠지만,
집에 여대생이 있다는 말에는 영문모를 박력이 느껴졌다.

일단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는 아직 밀림과 동거를 하고 있다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거 혹시 나도 모르는 새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며 이제 와서 생각했다.

뭐어, 세상도 그렇게까지 가십거리를 좋아하지 않기에
새내기 교사가 한 살 어린 연하와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으며 현재 동거 중이라고 해봐야 별일 없을 것이다.

이런 일로 별일이 있다면 언젠가 전생했던
이상한 도덕성을 가지고 있던 세계 정도일까.

아마 내가 맨 처음 태어난 세계였을 것이다.
그곳에는 묘한 매너와 묘한 도덕성 그리고
무엇이든 좋으니 남에게 설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나는 전생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맨 처음만큼은 전생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처음 지냈던 세상은 안전하긴 했지만,
묘한 폐색감이 존재해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었다.

뭐, 그 후 이렇게 백만 번의 전생을 반복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아, 빨리 죽고 싶다.

천수를 누리며 빨리도 느리게도 아닌 평범하게 죽고 싶다.

그것만을 바라고 있다. 지금도 그것을 바라고 있다.
이다음 인생을 가지고 싶지 않고, 몇 번이나 전생을 반복해 온 탓에
이제는 삶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 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세계에 태어나길 정말 잘한 걸지도 몰라."

진심으로 그렇게 중얼거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