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소설/백만 번 전생한 나는, 평화로운 세상이라도 방심하지 않는다. 79

69화 두 사람의 몫

'너한테 밖에 부탁할 수 없는 일이야.' 아마 초등 학과 시절의 나라면 [내게 부탁할만한 일이라면, 누구에게나 부탁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게까지 나 자신의 능력에 무지하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을 계속해서 단련해 왔다. [적]과의 싸움에 대비한 자기 단련이었다. [적]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단련하는 데 쓰는 시간은 쓸데없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재능이 없고, 불우하다─. 백만 번의 전생을 경험한 나지만, 최근 들어 남에게 자랑할만한 것들이 조금 생겼고, 마틴이 이렇게까지 나를 의지하는 것을 보면 그런 부분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기에 나는 당당하게 물었다. "내게 의지하고 싶은 건─ 청소냐, 빨래냐, 요리냐, 바느질이냐!? 자아, 어떤 거지!?" '..

68화 나, 권유받지 못했어

내 고민이 해결되자, 시선을 밖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수수께끼의 존재]에 대해, 뒤늦게나마 해석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밀림은 수수께끼 덩어리다. 물론 잘 알고 있다. 아기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기저귀도 갈아줬고, 자주 함께 놀았다. 요즘은 함께 지내는 시간도 많아졌고, 뭔가 축하할 일이 생기면 함께 하곤 한다. 한때, 그녀의 말버릇은 [나, 권유받지 못했어]였다. 사이가 좋으니, 놀 때 불러 달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귀여운 녀석]이라 생각하고 넘어갔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남자들끼리 놀 때는 보통 권유하지 않잖아?]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았다. 이미 지난 일이니 그냥 넘어가자고 생각해도,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밀림..

67화 정장 획득

최근에는 보기 드문 폭설이 잦아들 무렵, 나는 친가에 돌아가 부모님이나 밀림에게 스무 번째 생일을 축하받으며 정장을 선물 받게 되었다. 그것도 맞춤 정장으로. 이 세계의 의복은 이른바 [기성품]이라 불리는 옷과, 주문 제작으로 만들어지는 옷이 존재한다. 어느 쪽이 더 고급스러운지는 드는 수고의 차이를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올 것이다. 다만, 그만큼 주문 제작은 비싸다. 최근에 들어서 기성품과 비교했을 때 가격이 천지차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기성품 가격의 배 이상은 되었다. 세간에는 대학 입학식 날 정장을 입거나, 혹은 좀 더 좋은 옷을 입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보육 시설부터 대학까지 에스컬레이터 구조로 되어있는 우리 학교는 작년까지 입었던 교복을 입고 입학식과 같은 행사에 참여..

66화 한 구절

그날은 몇 년만의 폭설이 내려, 아침부터 여러 교통수단에 영향을 미쳤다. 뉴스에서는 끊임없이 폭설에 관련된 얘기들을 떠들며, 멈춘 지하철을 비추고 발이 묶여 곤란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비춰줬다. 나는 집에 틀어박혀 그 뉴스를 보며, 저 사람들은 [어째서 폭설이 예고되어 있는데, 밖에 나간 걸까?] 라는 사색에 잠겨 있었다. 그것은 [적] 때문이다. 역시 적은 존재한다…. 오랜만에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존재감이 없어, 내가 지금까지 적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대책들이 모두 헛수고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그야말로 본말 전도다. [적]은 없는 편이 좋은데, 있는 것에 기뻐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적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

65화 친구와 재회

쉴라라는 이름이 벌써 그립다고 느껴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가 서로 다른 학과에 진학한 것도 그렇고, 원래 우리들의 관계는 [시험 점수로 우열을 가린다]라는 것에 속해있었으므로 그 [시험]이 사라지자, 서로의 접점도 자연스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연말에 연락이 왔을 때는 놀랐고, 무슨 일 때문일지 고민하기도 했었다. 우리는 서로 경쟁하던 사이였던 것이다. 물론 협조를 한 적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대립 관계인 것이다. '교사가 되려고?' 진로에 관련된 상담 때문에 연락한 것이었고,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망설이고 있었다. 고민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어쩔 수 없이] 교사가 될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 대학의 이 학과에 지원한 것은 교사를 목표로 했기 때문인..

64화 렉스는 엄마인가요?

그나저나, 나와 마틴의 관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우리는 가끔 서로의 집에 놀러 가고는 한다. 우리 집에 마틴이 오면, 우리들은 특별히 뭔가를 하지는 않고, 그냥 적당히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시켜 먹거나,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거나 한다. 딱히 이야깃거리도 없고, 목적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의미 없는 얘기들을 주고받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마틴 집에 가는 경우는 얘기를 나눌 틈조차 없다. '렉스 엄마, 도와줘─!' 항상 그런 구원 요청을 받고, 나는 마틴의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수많은 [무장]들을 갖춘 채, 문 앞에 서서 외친다. "렉스야, 청소하러 왔어." '엄마─!' 마틴은 어린 아이나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내게 달려온다. 나는 상대방의 기세를 이용해, 마틴을 뒤로 집어던진 ..

63화 BL 동인지 제작 지휘 졸업

'이번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어.' 말이란 참으로 어렵다. 예를 들면 맛있는 사과를 먹었을 때, 이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맛있다는 한 마디로 표현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혹은 무언가와 비교하며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고, 단지 한 마디면 충분할 일에 어떻게든 무언가를 덧붙이려 한다. 그 결과,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정보까지 주고 말아, 그 사람의 인상이 나빠지게 만드는 일을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것이다. 이번에 카리나의 경우가 그랬다. 여름 코미케. 올해만큼은 여유 있게 시작해라, 제발 일정은 넉넉히 잡아라. 이런 식으로 사흘에 한 번씩 꾸준히 연락한 지 벌써 7개월─. [알겠어 알겠어.], [알았다니까.], [알고 있어.] 답..

62화 그녀의 이야기

마르깃이라는 두 살 연하의 아이가 새로운 알바생으로 들어온 것은 여름이 되기 일보직전의 어느 날의 일로, 새로운 알바생은 아무래도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같은 학교 출신이라길래, 본의 아니게 학교에서 유명인이 된 나라서 알게 된 것이겠지 하고 멋대로 납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밀림 선배한테서 많이 들었거든요.' 마르깃은 어째서인지, 언짢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언제나 언짢아 보였다. 그것도 그런 얼굴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와 관련되었을 때만 그런 얼굴이다. 분명 내가 모르는 사이 뭔가를 저지른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모든 행동을 자각하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럴 가능성 역시 충분히 고려해봐야만 한다. 그녀의 생김새는 어딘지 모르게 어리..

61화 봄 이야기

날씨가 쌀쌀해 코트를 입을만한 날이 없어, 세탁 시기마저 놓치고 말았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봄꽃은 이미 지고 있았고, 찬 바람을 쐬며 꽃구경을 한 사람들이 몸살을 앓는 소식들이 들려오던 가운데, 새 학년이 시작됐다. 나 역시 평범하게 강의를 들으며, 동아리 활동은 하지 않았고, (동아리 활동을 탈퇴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알바와 강의만을 반복하는 지루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드디어 밀림도 대학에 들어와, 그녀와 보내는 시간은 늘었지만, 딱히 우리 사이는 진전되지 않았고, 그저 같이 놀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같이 돌아갈 뿐이었다. 마치, 인생이 안정기에 접어든 기분이다. 백만 번의 전생 속에서 가끔 이런 때가 있었다. 안정기…. 쉽게 말해 [오늘과 같은 날이 계속되겠구나.]라고 생각되는..

60화 우리들의 미래 설계

내가 옛날에 전생했던 세계에서는 신데렐라 이야기라는 개념이 하나 존재했는데, 그것은 꿈이 가득 담긴 성공적인 소망을 의미했다. 최하층에서 노력하는 자가 기적을 동료로 삼아, 권력자의 눈에 띄어 결혼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었고─. 물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경험할 리는 없었다. 카리나 또한, [콘티 짠 것 좀 보내주세요.]라는 단순한 권유일뿐. 작가 데뷔는 전혀 아니었다. 그래도 카리나는 '다행이다…, 양복을 차려 입고, 면접을 보는 일 따위는 절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 다행이야….' 라며 기뻐하고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녀가 기쁘다면 무슨 상관이겠나. 견실함을 목표로 삼고 있는 나로서는, 그런 [도박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와 같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