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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소설/백만 번 전생한 나는, 평화로운 세상이라도 방심하지 않는다.

63화 BL 동인지 제작 지휘 졸업

by Hellth 2022.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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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어.'

말이란 참으로 어렵다.

예를 들면 맛있는 사과를 먹었을 때,
이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맛있다는 한 마디로 표현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혹은
무언가와 비교하며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고,

단지 한 마디면 충분할 일에 어떻게든 무언가를 덧붙이려 한다.

그 결과,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정보까지 주고 말아,
그 사람의 인상이 나빠지게 만드는 일을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것이다.

이번에 카리나의 경우가 그랬다.

여름 코미케.

올해만큼은 여유 있게 시작해라, 제발 일정은 넉넉히 잡아라.
이런 식으로 사흘에 한 번씩 꾸준히 연락한 지 벌써 7개월─.
[알겠어 알겠어.], [알았다니까.], [알고 있어.] 답변 혹은
읽씹, 심지어 나중에는 읽지조차 않았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던 도중, 아니나 다를까 결국 기한이
아슬아슬 해진 여름 코미케 준비를 하던 때의 이야기다.

이번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카리나가 말했다.

그것은 물론 [이번에는 이렇게까지 작업 일정이 미뤄진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라는 뜻으로,
그렇다면 지난번까지는 아무런 이유가 없었구나 라는 사실이,
노리진 않았지만 밝혀진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이번에는 상업지 원고를 작업하느라 그랬어.'

단편 작품이 잡지에 실리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업계적으로 볼 때, 비교적 유례없는 신데렐라 이야기이며,
(보통 작은 동아리에선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것 같다.)
역시 카리나는 영웅의 자질이 있고,

천운의 소유자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영웅이란,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야 할 때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다.

인도자가 필요할 때는 인도자가 나타나고,
동료가 필요할 때는 동료와 만나고,
경쟁자가 필요할 때는 라이벌이 출현한다….

이렇게 만난 사람들을 별똥별의 속도로 불사르며
나아가는 것이 영웅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중등 학과 시절 옥상에서 그녀를 만난 것도,
그녀가 가진 영웅의 자질에 이끌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그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 것인지는 평범한 나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그녀의 삶에 필요한 부품 중 하나로 내 생명 또한 있었을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다, 이제 슬슬 BL 동인지 제작 지휘를 그만두려고 했던 참이다.

이유는 내가 영웅이 아니라,
별똥별의 열기에 불살라지는 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이제 동아리를 탈퇴할 생각이야.
실은 지난번에 말하고 싶었는데,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렸어.
그러니 이번까지는 도와주겠지만,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야."

'이, 이유가 뭐야!? 왜 그만두는 건데!?'

나는 오래오래 살고 싶다.

하지만, 카리나 일행이 참가하는 행사의 준비는 틀림없이
내 수명을 깎아먹고 있다….

나는 깨끗한 방에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적당한 취미 활동을 하며,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고 싶다….

무리하는 것은 즐겁다.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생활로 내 심신을 혹사시키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누군가가 혹사당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이 충분한 수면과, 적절한 영양 보충을
할 수 있도록 일정을 짜려고 노력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왜냐하면 하루는 누구에게나 같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유 있게 시작하라 한 건데….

먹고, 자고, 치우고, 원고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

원고! 원고! 원고! 원고──!!

…같은 생활만큼은 그만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계획만 세우면 분명 부담 없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알겠어. 그렇네. 나도 제멋대로였지….
[끝까지 몰리지 않으면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라는 핑계를 대며,
벼랑 끝에 몰릴 때까지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어….'

진짜 장난하냐…!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든 억누를 수 있었다.

나는 잠자코 카리나의 얘기를 계속해서 들었다.

'…그래도, 알겠어. 앞으로는 제대로 계획을 세우고,
성실하게 만화를 그릴 거야.'

"그래, 나도 그게 좋다고 생각해…."

'그래서 렉스, 계획은 어떻게 세우는 거야?'

"……어?"

'세워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

말문이 턱 막혔다.

계획은 어떻게 세우는 거야? 세워본 적이 없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계획표를 짜는 건 초등 학과
여름방학 때 한 번쯤은 다 해보는 거 아니야?

"자아, 일단은 원을 그리고 하루 일과를 짜서,
원 안을 채워 넣는 형식으로 만들고,
달력에는 대략적인 일정들만 적어 놓고…."

'렉스, 나는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들어봐?
계획표대로 움직이는 것도 능력이야. 특수 능력이라고.
왜냐하면 우리는 내일 계획을 세운다고 한들,
정작 다음날이 되면 이미 흥미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기 때문이야.'

동아리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어!? 무, 무슨…. 아, 아니, 뭐라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흥미?
흥미랑 계획표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내가 지금 외계인이랑 대화를 하고 있는 건가?

계획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서로가 너무나 달라,
우리의 대화가 맞물리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지금 내가 말하는 언어가 카리나가 말하는 언어와
같은 언어가 맞는지, 그저 비슷할 뿐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언어가 아닐지, 진심으로 의심했다.

시험 삼아, 팬케이크라고 말해봤다.

카리나는 [먹고 싶네.]라고 얘기했다.

대화가 통한다.
나는 더욱 더 혼란스러워졌다.

'렉스,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아.
그러니까…, 우리들의 1년 치 계획표를 네가 세워줬으면 해.'

"어? 내가? 내가 왜?"

모르겠다. 전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너라면 콘티 작업과 마무리 작업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것 같아….'

'프로를 지향하는 내가 무리하지 않고 오래오래 살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줘. 부탁드립니다.'

"어? 흐음─, 무리하지 않고 오래오래 살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주면 된다, 이거지?"

'응! 그럼 코미케 준비는 후딱 끝내버리자!'

"아…, 응…."

이렇게 나는 BL 동인지 제작 지휘에서,
카리나 일행의 매니저로 직업을 변경했다.

이것이 나중에 인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결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꽤 나중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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