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가물 6

63화 BL 동인지 제작 지휘 졸업

'이번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어.' 말이란 참으로 어렵다. 예를 들면 맛있는 사과를 먹었을 때, 이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맛있다는 한 마디로 표현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혹은 무언가와 비교하며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고, 단지 한 마디면 충분할 일에 어떻게든 무언가를 덧붙이려 한다. 그 결과,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정보까지 주고 말아, 그 사람의 인상이 나빠지게 만드는 일을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것이다. 이번에 카리나의 경우가 그랬다. 여름 코미케. 올해만큼은 여유 있게 시작해라, 제발 일정은 넉넉히 잡아라. 이런 식으로 사흘에 한 번씩 꾸준히 연락한 지 벌써 7개월─. [알겠어 알겠어.], [알았다니까.], [알고 있어.] 답..

56화 계약 만기, 갱신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사랑] 이라는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고 싶다. 지금 당장 죽고 싶다. 죽은 다음에 환생 따위는 없는 [완벽한 죽음] 이야말로, 나의 가장 큰 소망이다. 그렇다면 [완벽한 죽음] 을 맞이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천수를 누리는 것] 이 유일한 방법이다─. 라고 [전지 무능한 존재] , 흔히 말하는 [신] 에게 그렇게 전해 들었다. 환생할 때마다, 그 시절 내가 가장 사랑했던 존재의 외견으로 나타나는 전지 무능한 존재는 경계심이 녹아버릴 정도로 달콤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합니다]. 사랑하기에, 나를 되살리는 것이라 했다. 사랑하기에, 내가 전생을 반복하도록 하는 것이라 했다. 사랑하기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삶을 맛보게 하고 싶다는 단순한 생..

52화 만약 처음 만난 여성이 메인 히로인이라 한다면

동경은 사람을 바꾼다. 예를 들어, 18년 전쯤의 나는 세상 모든 것들을 미워하고, 의심했으며 어떤 세상에 태어나도 적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투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이 세상에서 오래 살다 보면 비유로 밖에 들리지 않는 이 말이 나의 표어이자, 나의 현실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경주는 시작되고, 누군가 죽는 것이 유일하게 나 자신의 생존 시간을 늘려주는 방법이라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그걸 바꿔준 여성이 존재한다. 바로 엄마다. 생후 몇 분 된 내가 이 세상에 믿어도 될만한 상대가 있다고 믿게 된 것은 분명 그녀 덕분이다. 고민이 있을 때마다 그녀는 내게 조언을 해주었다. 나의 고민은 내가 해결했지만, 그 해결법에 대한 힌트를 준 것은 엄마였다. 18살 겨울, 내 성장이 ..

49화 늪

후덥지근한 더위가 강해질 무렵, 나는 학교에서 진학 확정을 받고, 밀림과 어딘가로 외출하는 일이 많아졌다. 딱히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모처럼의 연애 수습 기간이니, 뭔가 특별한 도전을 해봐야 할지도 모르지만, 까놓고 말해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뭐든 상관없지 않아?]라는 밀림의 호의에 응석을 부리며 우리들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같이 놀거나 무언가를 배우거나 하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름의 더위가 강해지자, 무슨 일이 벌어질 거 같다는 기대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러던 때, 한 통의 문자가 또다시 나를 혼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올여름은 어때? 수험 준비?' 카리나로부터의 권유…. 아니, 권유가 아니었다. 작년에 카리나 일행과 함께 심연을..

44화 새로운 생명

붉은빛을 띤 이파리가 어제 내린 비로 인해, 땅에 달라붙어 있다.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파릇파릇한 녹색 잎들은 지고, 주위에는 낙엽들이 깔려있었다. 특히 고등 학과 교사로 향하는 비탈길은 이맘때쯤이면 가로수에서 많은 잎이 떨어져, 청소를 하는 사람들과 학생들이 인사를 나누는 광경은 이 계절의 구경거리가 되어있었다. 너무나도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우리는 다시 한 걸음 진급에 다가간다. 문화제, 학생회 선거도 별 탈 없이 끝마치고, (또 학생 회장이 되었다) 올해의 행사들도 대부분을 끝마쳤을 무렵, 드디어 학년 내에 만연한 연애 열병도 시들시들해져 가는 기미가 보이는 데다, 날씨도 선선해져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과하게 [공부하고 있는 어필]을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고, 수업 중간중간 잡담..

41화 여름 축제의 권유

푸르른 하늘이 원망스럽다. 묘하게 어수선한 공기가 교실에 흐르는 가운데, 그런대로 빠른 속도로 봄이 지나가고, 기어코 교사까지의 언덕길을 오르기만 해도 땀방울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무더운 계절이 왔다. 들떠있는 분위기는 여름의 열기 탓에 교실 안, 아니, 2학년이 생활하는 2층 그 자체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긴장감이 돌고 있다. 모든 것은 [연애] 때문이다. 연애라는 이름의 열병은 여름의 열기에 달아올라, 점점 더 심각한 질병으로 변화하고 있다. 나는 연애에 흥미가 없다─. 흥미가 없지만, 어딜 보나 이 열병에 걸린 녀석들만 보이는 상황이기에 연애에 흥미가 없다는 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나는 솔직히 굉장히 분노하고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본 적 있겠지. 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