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취미는 BL 동인지 제작 지휘다.
그렇다기보다는 지휘관을 희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카리나에게 '취미다' 라는 얘기를 듣고,
냉정하게 BL 동인지 제작 지휘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관찰해 봤더니, 영문을 모를 정도로 텐션이 높고,
굉장히 생기가 넘쳤다.
나는 누군가를 이끄는 것을 좋아하고,
정해진 계획대로 진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왜 그런 걸까 하고 생각해보니,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은 지난 백만 번의 전생 속에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과거에 이루지 못한 것들이,
작게나마 현재의 삶에서는 이루어지고 있던 것이다.
불화도 없고, 의견 충돌 또한 없다.
카리나 일행과 신인까지 포함해,
내 지휘를 잘 따르고 있고, 동기 부여 또한 높다.
……그렇군, 완전히 이해했어.
이건 함정이다─.
나는 기분 좋게 BL 동인지 제작 지휘를 하고 있다.
마감이 다가올수록 언행은 거칠어지고, 고함도 치고,
다들 극한까지 몰린 상태라, 울고 화를 내기도 했지만,
결국 내가 세운 계획대로 다들 움직여주고 있다.
이때 방심한 내 뒤통수를 치는 것이 적의 노림수다.
그렇다면 [적]은 어디에 있는가?
카리나가 속한 동아리 멤버일까?
아니면 동인지 즉매회의 운영에 섞여 있을까?
모른다─.
하지만, 슬슬 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나는 방심하고 있었다.
19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에,
이 세상은 평화롭다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긴장을 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내 취약한 정신은 금방 안심하려 들고,
지금처럼 행복한 나날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위험했다─.
방심하고, 적이 없다고 판단했을 때,
[적]은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신이 나서 카리나 일행에 대한 배려를 잊어버렸다면,
나는 분명 끔찍한 복수를 당하고,
카리나 일행과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선, 적을 늘리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팬케이크를 구웠다.
우리의 계획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촉박하다.
심지어 매번 참여할 때마다, 더욱더 아슬아슬해지고 있다.
"진작에 나를 좀 부르라고, 그보다 작업이나 시작해.
펜을 음속으로 움직이면 마감을 맞출 수 있을 거야."
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에너지 드링크와 영양제 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피부도 거칠어지고, 마음 또한 거칠어진다.
나 또한 코스프레 의상 제작 때문에,
시간적 여유는 전혀 없는 상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케이크를 구웠다.
크림을 바르고, 과일을 올렸다.
잘 익은 벼와 같은 색으로 구워진 팬케이크 위에
주르륵 하고 벌꿀이 흘러내리는 모습은,
거칠어진 정신을 가다듬는 효과가 있다.
나는 모두에게 외쳤다.
여유는 없지만, 잠깐 티타임을 가지자고.
모두들 처음에는 싫어했지만,
억지로 팬케이크를 먹이자, 차를 마시게 되었고,
날이 서있던 정신이 부드러워지며,
자연스레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런데, 수다가 끝나질 않는다.
어, 언제까지 계속할 셈이야?
다 먹었으면 얼른 산뜻한 기분으로 작업을 다시 시작하자고….
나는 초조했다.
하지만, 카리나 일행이 한번 떠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어쩌지, 내가 준비한 팬케이크 때문에, 목숨과도 같은
귀중한 시간들이 덧없이 흘러간다.
드디어 어떻게 해도, 절대 마감을 맞출 수 없는 수준까지 왔을 때,
나는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반드시 모든 일에 [성공] 할 필요는 없어.
실패해도 돼.
내 인생에 부족한 것은 실패를 받아들이는
너그러움이었구나.
나는 카피본 제작에 필요한 스테이플러를
인원수만큼 준비하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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