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몇 년만의 폭설이 내려,
아침부터 여러 교통수단에 영향을 미쳤다.
뉴스에서는 끊임없이 폭설에 관련된 얘기들을 떠들며,
멈춘 지하철을 비추고 발이 묶여 곤란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비춰줬다.
나는 집에 틀어박혀 그 뉴스를 보며,
저 사람들은 [어째서 폭설이 예고되어 있는데, 밖에 나간 걸까?]
라는 사색에 잠겨 있었다.
그것은 [적] 때문이다.
역시 적은 존재한다….
오랜만에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존재감이 없어, 내가 지금까지 적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대책들이 모두 헛수고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그야말로 본말 전도다.
[적]은 없는 편이 좋은데, 있는 것에 기뻐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적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이 확실하며 제발 있어 달라고까지 바랄 정도다.
나는 적과 싸워 승리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싸우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말해놓고선,
그럼에도 싸워 승리를 쟁취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영웅이 되고 싶다─.
그렇지만 적은 악이다.
오늘 상황을 보면 그렇게 확신할 수 있다.
[적]은 많은 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입장에 서있다.
인명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없을 터인데,
사고가 날 법한 날에도 사회는 일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그렇다.
뉴스에 교통마비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모두 적의 의도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부러 폭설에 의해 운행이 정지될 것이 틀림없는
교통수단에 의지해 죽을지도 모르는 폭설 속을 뚫고 가는 이유를 모르겠다.
분명 인질이라도 잡혀 있는 상태일 것이다.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월급]이나, [진급]과도 같은
생활의 근간일 것이다.
우선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개념 자체가
나는 적의 책략이라 생각하고 있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 세계 문명은 의도적인
뒤틀림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어딘가에서 다른 길을 선택하면 인류가 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던
세계가 존재했지만, 적이 계속해서 방해하는 바람에
현재의 인류는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인류로부터 노동이라는 굴레를 벗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위인들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런데도 실현시키지 못한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적]의 적은 인류 그 자체이고, 사회이며,
문명 그 자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안심해도 되는 점이 있다.
적은 사회를 외부에서 조종하는 존재일 뿐,
사회 그 자체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를 믿길 잘했다. 아빠를 믿길 잘했다.
안나 양을, 밀림을, 마틴을, 쉴라를 믿어서 다행이다.
카리나는… 흐음….
믿고 있다고 해야 할까, 내버려 둘 수가 없다고 해야 할까,
그런 느낌이라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뭐, 어쨌든 믿길 잘했다.
"믿어서 다행이야─! 그치! 응!"
'렉스, 너 술 약하구나…….'
오늘은 내 스무 번쨰 생일이다.
공교롭게도 폭설 때문에 전날부터 내 집에 묵고 있는 마틴과는 별개로,
폭설 예고를 보고 미리 음식을 쟁여둔 나로서는 빈틈이 없다.
'그래 그래, 알겠어. 그러니까 이제 좀 자. 일단 자.'
마틴이 나를 침대에 던졌고, 나는 그대로 뒹굴다 잠들었다.
스무 살. 나는 스무 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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