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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소설/백만 번 전생한 나는, 평화로운 세상이라도 방심하지 않는다.

14화 가축화된 사람들

by Hellth 2022.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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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다.

유치원은 대체로 30명씩 나눠 그룹을 편성하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슬라임 조]에 속해 있다.

슬라임이라는 것은 애완동물로 많이들 기르는 평범한 생물이며,
아침마다 마도 영상판 티비에서 특집 프로그램
[당신네 집의 귀여운 슬라 쨩 방문]이 방영될 정도이다.

지루한 뉴스들 사이에 끼어 방영되는 이 코너는
바쁘고 짜증 나기 쉬운 아침에 시원한 사이다 한 잔
되어주기에, 주로 마마가 자주 챙겨보곤 한다.

나도 내 슬라임을 갖고 싶지만, 돌보기가 의외로 까다로워 보이고,

애완동물 가게 유리에 달라붙어 안을 들여다보니,

4살짜리 아이에게는 터무니없는 가격이 붙어 있었기에,

가지고 싶어도 무리라는 느낌이다.
저 몰캉몰캉한 몸체에 기대거나, 껴안아보고 싶다….

어쨌든 그런 고로 조 대항전 운동회다.

그 외에는 [앰브로시아 조], [빗자루 조] 등이 있는데,
[생물로 할 건지, 식물로 할 건지, 도구로 할 건지,
뭐든 좋으니 통일 좀 시켜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의 의도가 있다는 것에는 틀림없기에 차차 조사해 나가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운동회가 먼저다.
먼저라기 보단 이미 시작했다.
방금 막.

슬라임의 이름을 단 이상 패배는 용납되지 않는다.

슬라임은 굉장하다.
아븐로… 암부로… 앰부로치… 아, 어쨌든
저 뭔지 모를 이름을 달고 있는 조에게는 절대 질 수 없다.

짊어지고 있는 이름의 무게가 다르다. 무게가.

그렇다, 그렇기에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

우리들은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녔다.
커다란 공을 굴려가며 재빠르게 골인시켰다.

이쪽에는 4월생인 쉴라가 있다.
역시 4월생은 대단하다. 체격이 크고 당연히 발도 빠르다.
게다가 공의 컨트롤도 능숙하게 해내고 있다.
우리들은 쉴라를 필두로 순조롭게 점수를 쌓아갔다.

운동회는 여흥이긴 하나, 놀이는 아니다.

우리들은 진지하게 승부했다.
줄다리기도 대충 하지 않는다.
계주 역시 마찬가지다.

학부모 대항 물건 빌리기 경주에서는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응원은 도중에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변질되었고,
나중에는 누구를 응원하고 있었는지 조차 까먹고 말았다.
참고로 학부모 대항전은 몸치에다 두뇌파인 파파가
발목을 잡아 패배하고 말았다. 장난하냐!

역시 파파는 [적]들의 앞잡이일지도 모른다.

나는 승리를 갈망한다. 그렇기에 [적]은 나에게서
승리를 빼앗으려 드는 것이다. 어느 세계에서나 그랬다. 
원하는 것은 손에 넣을 수 없었다.
파파도 나중에 세밀하고 조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는 네 책장에 야한 책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그렇게 슬라임 조와 앰브머시기 조는 비등비등해졌다.

약간 슬라임 조가 우세하긴 하지만, 나는 절대 방심하지 않는다.
빗자루 조 같은 송사리들은 신경 밖이지만,
앰브로시아 조에는 드문드문 4월생, 5월생이 보였기 때문이다.

빨리 태어났다는 건, 강점이 된다.
특히나 우리 유아들은 성장이 빠르기에, 반년 정도만 빨리 태어나도,
이미 완전히 다른 생명체라 지칭해도 좋을 정도다.

치열한 접전 끝에 결국 승부는 마지막 종목
[반 대항전 계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 계주의 승자가 운동회의 승자가 된다─.
여기서 백만 번의 전생을 겪어온 나의 경험을 살릴 때다.
다른 아이들은 각자 좋아하는 캐릭터를 선택하고 분장을 하는 가운데,
나는 [운동하는 유치원생]의 선택하고 분장을 했다.

즉, 가장 [움직이기 편한 복장]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 나의 지략 덕분에 운동회는 슬라임 조가
우승하게 되었다.

아이들조차 알 수 있을 정도의 점수 차이다.
우리들은 이미 네 살.

그렇다─, 숫자를 읽을 줄 아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원장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모두들 참 잘했어요, 전원이 우승이랍니다.'

……뭐라고?

화가 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원장]이라는 거대한 권력에 저항할 수는 없다.
혼자가 무리라면 여럿이서 하면 된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납득하지 못 한 얼굴을 한 아이들을 찾았다.
이렇게 치열한 경쟁을 시켜 놓고, [전원이 우승이랍니다.]?

그냥 넘어갈 리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내가 본 광경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광경이었다.

미소.
어디를 둘러봐도 미소.

모두가 성취감에 취해,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3위인 주제에 우승 취급을 받는 빗자루 조의 멍청이들이
웃는 거야 이해가 간다만, 그렇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한
앰브로시아 조까지 웃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 조원들도 모두가 웃고 있었다.

모르겠다. 나는 휘청거렸다. 열사병일까?
오늘은 유독 햇살이 뜨겁다….

……5월의 하늘은 높고 푸르구나.

아니, 그게 아니다. 열사병이 아니다.
나는 눈치채고 말았다.

세뇌당했다.

투쟁심이라고 하는 것을 빼앗긴 것이다.
치열한 접전 끝에 승리를 쟁취했는데,
그 승리를 빼앗기고도 미소 짓고 있다.

나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나, 혼자라도 화를 내야 할까?
아니야, 그러지 않는 편이 좋아.
나는 감정을 통제할 줄 아는 4살.
발을 크게 굴러대며 분노를 발산했다.

으기이이익…! 감정을 통제…
우오오오옷──!

'레, 렉스, 대체 무슨 일이니?'

가까이 있던 마마가 나를 불렀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학부모!
이런 결말에 학부모들조차 항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히 이상한 상황이다. 즉, 세뇌가 맞다는 소리다.

나는 분노에 몸을 맡긴 채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발을 굴렀던 탓에 다소 가라앉았다.

그래, 냉정해지자….
나는 내 허벅지를 꼬집어 나 자신을 훈계했다.
진짜 아프다.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아프다고….

하지만 그로 인해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위기를 기회로 바꿀 줄 아는 4살!
역경에서조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까지 부자연스러운 상황이라면
[적]의 의도조차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번 세계에서 아직도 숨을 죽이며, 몸을 사리는
[적]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의 [투쟁심]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드디어 [적]의 목표가 일부 드러난 것이다. 기뻐하자.

비록 이 패배는 분하다만, 적들이 투쟁심을 두려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계속해서 투쟁심을 가지고 있으면 된다….
나는 학습하는 4살. 글자도 누구보다 깔끔하게
쓸 수 있고, 달리기 역시 계주 대표가 될 정도로 빠르다.
게다가 애벌레 경주에서는 선두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쓰라린 패배를 대가로
적의 정체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었다.

비록 승리는 빼앗겼지만, 나는 잊지 않겠다.

101 대 99, 명백한 슬라임 조의 승리라는 것을.


우리가 이긴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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